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기업소개
2008. 12 2008 정부업무 정보화 부문 우수기관 선정 및 수상, 본부체체 조직확장
2008. 07 구로구 신청사 이전
2008. 07 제2대 이대영 원장 취임
2008. 01 문화예술교육 전문인력 아카데미 'CETA' 운영 및 공식 브랜드화
2007. 12 문화예술교육 수혜자 백만명 달성, 예술강사 5천명, 학교 및 복지지설 만개 참여
2007. 01 문화예술교육 아카데미 운영
2006. 12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문화예술교육 전문인력 교육기관으로 지정
2006. 08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특수법인으로 전환
2006. 06 문화예술교육 지원법 시행
2005. 12 문화예술교육 지원법 제정
2005. 11 제1호 예술교육 세계대회 아태지역 준비회의 개최, 아태지역 예술교육 로드맵 수립
2005. 02 재단법인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설립(1대 김주회 원장 취임)
2004. 11 문화예술교육활성화 종합계획 수립
이 기업에 입사해야 하는 이유
문화체육관광부의 계열사
29개
오시는 길
기업정보는 사업자등록번호를 기준으로 동일하게 관리되며, NICE평가정보, 이크레더블, 금융감독원(DART), 크레딧데이터(국민연금), 기업회원이 직접 입력한 데이터를 활용하여 제공하고 있습니다.
-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전시, 컨벤션 및 행사 대행업 관심횟수 608 관심기업 등록
- 한국콘텐츠진흥원 그 외 기타 분류 안된 사업지원 서비스업 관심횟수 2038 관심기업 등록
- (재)한국문화정보원 그 외 기타 협회 및 단체 관심횟수 1044 관심기업 등록
-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공연시설 운영업 관심횟수 671 관심기업 등록
2008. 12 2008 정부업무 정보화 부문 우수기관 선정 및 수상, 본부체체 조직확장
2008. 07 구로구 신청사 이전
2008. 07 제2대 이대영 원장 취임
2008. 01 문화예술교육 전문인력 아카데미 'CETA' 운영 및 공식 브랜드화
2007. 12 문화예술교육 수혜자 백만명 달성, 예술강사 5천명, 학교 및 복지지설 만개 참여
2007. 01 문화예술교육 아카데미 운영
2006. 12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문화예술교육 전문인력 교육기관으로 지정
2006. 08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특수법인으로 전환
2006. 06 문화예술교육 지원법 시행
2005. 12 문화예술교육 올림픽 무역 교육 지원법 제정
2005. 11 제1호 예술교육 세계대회 아태지역 준비회의 개최, 아태지역 예술교육 로드맵 수립
2005. 02 재단법인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설립(1대 김주회 원장 취임)
2004. 11 문화예술교육활성화 종합계획 수립
주그리스 대한민국 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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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그리스 대한민국 대사관 주소 : Athens Tower A' building ,19th Floor, 2-4 Messogion Avenue, 115 27, Athens, Greece 전화번호 : +30-210-698-4080 | 긴급연락처 : +30-694-611-7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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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무역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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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영호 기자
- 승인 2013.07.08 16:05
- 댓글 0
대한민국 세계기능올림픽 선수단이 8일 오전 독일 라이프치히 무역전시센터에서 끝난 제42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 12개, 은메달 5개, 동메달 6개, 우수상 14개 등을 획득하며 종합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이번 대회 철골구조물 직종에서 금메달을 딴 원현우(인천기계공고 졸업생) 선수는 전체 직종을 통틀어 최고득점자에게 주어지는 대회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돼 알버트비달상(Albert Vidal Award)을 수상하여 그 영예를 더했다.
한편, 인천광역시교육청 윤인문 정보직업교육과장은 "인천 직업교육을 기초ㆍ기본교육의 충실과 기능영재 양성 이라는 투트랙을 강조한 명품 인천 직업교육 정책이 뒷받침 되어 이와 같은 결과로 나타났다"라고 강조하면서 "앞으로도 학교현장에서 묵묵히 직업교육에 매진하고 있는 일선학교와 선생님들을 위한 지원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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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올림픽 경기대회. 올림픽대회.
정의
요약문
서울올림픽대회는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올림픽 경기대회이다. ‘화합과 전진’이라는 기치 아래 160개국 1만 3,626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여 기량을 겨루었다. 동서 냉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치러진 이 대회에 대부분 공산국가인 미수교국이 대거 참가해 세계평화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 대회에서 한국스포츠가 이룩한 세계 제4위라는 지위는 스포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정치·경제·문화적으로도 세계 열강의 지위를 굳힐 수 있는 계기와 바탕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개설
1981년 9월, 올림픽의 서울 개최가 결정된 후부터 온 국민의 기대와 전세계의 관심 속에 준비가 진행되어, 경기가 개최된 16일 간 뿐만 아니라 이전, 이후의 모든 일정이 성공리에 끝을 맺었다.
유치경위
1980년 3월 7일 문교부 체육국 주재 관계기관 회의를 계기로 올림픽 유치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9월 29일 대한올림픽위원회(Korean Olympic Committee, KOC) 10인소위원회와 11월 6일 대한올림픽위원회 확대상임위원회를 거쳐 12월 2일 서울특별시가 국제올림픽위원회(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IOC)에 올림픽 유치 후보도시로 신청하게 되었다.
이에 12월 15일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대한올림픽위원회에 올림픽 유치에 따른 질의서를 보냈으며, 12월 23일 문교부에 올림픽 유치 대책협의회가 구성되어 질의응답서 올림픽 무역 교육 작성 등 실무작업이 본격화되었다.
이어 1981년 2월 13일 국제올림픽위원회로부터 서독 바덴바덴 총회에 참석할 대한민국 대표단원 규모를 통보해 달라는 요청이 왔으며, 2월 26일 정식답변서를 제출하고 3월 27일 올림픽유치대책위원회 및 세부 계획안을 작성했다.
3월 30일부터 4월 4일 사이 서울이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국가올림픽위원회(National Olympic Committee, NOC) 조사단의 방한이 있었고, 4월 4일부터 8일 사이 같은 목적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 조사단이 방한했다.
그리고 6월 9일부터 11일 사이 국제스포츠연맹(International Sports Federation, ISF) 조사단이 서울에 다녀갔으며, 7월 9일부터 11일 사이 전상진(全祥振)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 베네수엘라에서 개최된 미주(美洲) 국가올림픽위원회 총회에 참석, 올림픽 유치교섭을 벌였다.
8월 6일부터 9일 사이 대한올림픽위원회는 인도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인 라자 발린드라 싱을 서울로 초청했고, 8월 16일부터 20일 사이 노르웨이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스타우보를 초청, 올림픽 유치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개최의의
1981년 9월 30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는 1988년 하계올림픽의 개최지로 서울을 선정했다. 한국의 서울과 일본의 나고야[名古屋]가 입후보했는데, 이 총회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 비밀투표를 실시한 결과 52 대 27로 서울이 개최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특히, 1980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2회 올림픽대회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60여 개국이 불참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23회 올림픽대회는 소련 등 동유럽 국가 18여 개국에서 역시 불참했다.
이처럼 올림픽이 정치적 대결로 중대한 위기에 처한 시점에서,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제24회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게 된다면 세계평화를 정착시키는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이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서울올림픽 개최를 결정한 것도 스포츠를 사랑하는 한국민의 적극적인 자세를 편견 없이 받아들인 것이며, 인류의 스포츠대제전이 정치적인 이유로 손상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대회준비 및 운영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뒤 7년 동안, 각종 시설과 준비 및 운영에 투입된 비용은 모두 2조 3826억 원에 이른다. 이 중 대회 직접사업비는 1조 1084억 원이고 여건조성사업비는 1조 2742억 원이다. 이 비용에는 체육시설투자·올림픽대로 건설 및 한강종합개발·김포공항 확장공사·가로정비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도 포함되어 있다.
서울올림픽 폐막 직후 박세직(朴世直)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은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공동 기자회견을 했는데, 서울올림픽은 2520억 원의 흑자를 기록한 대회였다고 발표했다.
총지출은 5890억 원이었고 총수입은 8410억 원이었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자체의 재정흑자 2520억 원 가운데는 정부출연금 371억 원, 선수촌·기자촌·패밀리아파트 분양기부금 1315억 원, 국민성금 565억 원, 올림픽공원 내 조형작품 조성기부금 90억 원 등 모두 2341억 원의 기부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순수한 올림픽 관계 이익금은 179억 원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또한 이익금 중에서 12억 7000여만 원을 국제올림픽위원회 지분으로 할당하고 올림픽공원 내에 있는 세계평화의 광장에 1억 8000여만 원을 들여서 올림픽운동 기념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 지분이란 당초에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와 국제올림픽위원회가 합의했던 사항으로서, 서울올림픽을 통해 1000억 원 이상의 흑자를 내면 0.48%를 국제올림픽위원회에 할당하고, 1000억 원 미만이면 20만 달러 이하를 할당하기로 한 것이다.
수입 부문을 세분하면 텔레비전 방영권료 2188억 원, 아파트 분양수익금 1315억 원, 휘장사업 수입금 819억 원, 기념주화 판매수익금 1208억 원, 올림픽복권 수입금 1174억 원, 국내외 성금 565억 원, 광고수입 282억 원, 입장권 판매수입금 209억 원, 선수촌과 기자촌 입촌료 116억 원, 우표 판매수익금 25억 원, 조형작품 조성기부금 90억 원, 정부출연금 371억 원, 이자 48억 원 등이다.
서울올림픽에 사용된 경기장은 모두 34개이며 연습장은 72개였다. 개회식과 폐회식, 축구와 승마 결승전, 그리고 육상경기가 거행된 올림픽 주경기장은 송파구 잠실동에 있는 메인스타디움으로서 필드의 넓이는 105×67m, 수용인원은 7만 명이다.
이 경기장은 건축가 김수근(金壽根)의 설계로 만들어졌으며, 1986년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때도 메인스타디움으로 사용되었다. 스탠드가 2층으로 꾸며졌고 스탠드 위에 완만한 곡선의 지붕을 씌웠기 때문에 한국적인 미와 조화를 느낄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이 밖에 송파구 방이동에 마련된 올림픽공원에는 사이클경기장(트랙 333.3m, 수용인원 6000명)·체조경기장(바닥넓이 67×43m, 수용인원 1만 5000명)·펜싱경기장(바닥넓이 70×55m, 수용인원 7000명)·역도경기장(바닥넓이 50×35m, 수용인원 4000명)·테니스경기장(면 18개, 수용인원 1만 5000명)·수영경기장(연면적 7585평, 지하 1층 지상 3층의 경영풀: 50×25×3m, 다이빙풀: 25×25×5m, 연습풀: 50×12·5×2m, 수용인원 1만 명) 등이 있고, 경기종목에 따라 각종 경기장이 분산되어 있다.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때도 사용된 농구경기장(바닥넓이 49×42m, 수용인원 2만 명)·복싱경기장(바닥넓이 48×40m, 수용인원 8000명) 등은 송파구 잠실동에, 조정경기장(코스 132×2212×3m, 수용인원 2만 5000명)은 경기도 광주군 미사리에, 승마경기장은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서울승마공원(마장마술 11면, 수용인원 3만 명)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종합마술경기장(마장마술 28∼32㎞)에서 각각 치러졌다.
서울대학교·한양대학교 체육관은 각각 탁구와 배구경기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상무체육관은 레슬링경기장으로, 장충체육관은 태권도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 요트경기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수영만에 설치된 4개 경기장에서 거행되었다.
서울올림픽이 개막되기 14일 전인 9월 3일부터 선수들을 맞아 올림픽이 끝난 3일 뒤인 10월 5일에 모든 선수을 돌려보낸 이 선수촌에는 모두 1만 3626명이 투숙했다. 입촌비는 1인 1일 42달러였으며, 주요 시설은 아파트 86동으로 여기에는 선수·임원 숙소와 라운지·관리실·국가올림픽위원회사무실 등이 있었다.
선수회관은 지하실에 대표단 부사무실·휴게실·진료실·국제행사 부사무실·디스코테크·주방·창고 등이 있고, 1층에 안내센터·국가올림픽위원회 서비스센터·전신전화국·식당·경기안내센터·비디오 및 유선텔레비전(CATV)실·우체국·은행·식전사무실, 2층에 식당·극장·전자오락실·탁구장·한국관(관광안내소)·항공안내소, 3층에 쇼핑센터·국제올림픽위원회 사무실·이용원·미용원·당구장·세탁소·음악감상실·다방·회의실·사진관 등이 있었다. 이 밖에 행정센터·선수촌본부·IP라운지·합동상황실·병원·종교관 등이 고루 갖추어 있었다.
메뉴는 5일 주기였으며 1일 영양가는 6000㎈ 이상이었다. 아침 밥은 6시부터 10시까지, 점심시간은 11시부터 16시까지, 저녁시간은 17시부터 23시까지였으며 남은 시간에는 간식을 제공했다.
숙소 관리에서 소모품은 룸메이드를 통해 수시로 보급했으며, 정리정돈 및 청소도 룸메이드가 담당했다. 리넨류는 무료 서비스, 시트·베갯잇은 3일에 1회씩, 타월류는 1일 1회씩 세탁했다. 전화기·텔레비전·전열기(커피포트) 등은 안전관리상 선수숙소에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
각국 선수단이 입촌할 때는 반드시 선수촌 내 야외 국기광장에서 입촌 공식행사를 하고 상견례를 마친 뒤에 입촌했다. 매일 저녁 8시에는 선수회관식당에서 재촌자(在村者) 중 그날이 생일인 선수들을 위한 생일축하 행사를 가졌다. 행사는 먼저 축하음악 및 축하의 말에 이어 생일을 맞는 선수의 인사말이 있고 선물증정의 올림픽 무역 교육 순서로 진행되었다.
보도진의 취재와 송고활동에 적합한 시설·장비·물자와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메인프레스센터(Main Press Center, MPC)가 설치되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의 한국종합전시장 별관에 마련된 메인프레스센터는 1988년 9월 3일부터 10월 5일까지 운영되었으며, 주요 시설으로 공동기사 작성실, 언론사 개별 사무실, 임시 전신전화취급소, 기자회견실, 사진현상소, 카메라 수리 및 대여소, 식당, 의무실, 경기결과 복사 배포실, 공동시청실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메인프레스센터를 이용한 보도진은 인쇄매체의 취재기자 3864명, 사진기자 533명, 기술보조원 800명이었는데, 그 중 외국 기자가 4297명이고 국내 기자는 900명이었다.
각 경기장에는 메인프레스센터의 기능을 대행할 수 있는 SPC가 따로 설치되어 있었으며, 각 SPC에는 보도석·공동 기사작성실·임시 전신전화취급소·인터뷰실·휴게실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보도사진 서비스를 위해 사진현상소와 카메라 수리 및 대여소를 설치, 운영했고, 메인프레스센터와 경기장 간의 필름을 전달하는 일과 각 경기장 내 사진 촬영지역을 올림픽 무역 교육 선정해 주는 일 등을 했다.
인쇄매체 보도진과는 별도로 전파 및 음파매체 보도진을 위한 국제방송센터(International Broadcasting Center, IBC)는 여의도의 한국방송공사(KBS) 본관 옆에 따로 설치되었으며, 규모는 2만 2156평에 지하 2층, 지상 9층이었다.
국제방송센터를 이용한 방송인은 국내인 3160명, 외국인 6250명 등 모두 9410명이었다. 기본 영상·음향 분배·해설음향 분배·일일 요약물제공·국제송출 은행 등의 기본 시설과, 편집 및 본국 송출 등을 돕기 위한 개별 시설을 비롯, 방송자료 정보제공·예약사무소·회의실·정보센터·은행·우체국·식당·응급실 등 지원시설을 갖추었다.
올림픽에 처음으로 컴퓨터가 등장한 것은 1960년 미국의 스퀘어벨리에서 열린 제8회 동계올림픽 때였다. 비록, 경기결과만을 처리하는 소규모였으나 이때부터 올림픽에서의 컴퓨터 활용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으며, 1972년 뮌헨올림픽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때는 종래의 전자전송 시스템인 EMS를 개발해 경기결과 제공 뿐만 아니라, 참가선수·임원·보도진·조직위원회직원 등 모든 올림픽가족 상호 간의 연락체계까지 확립했다.
서울올림픽에서 사용된 전산시스템을 기능별로 나누어 보면, 경기운영시스템(Games Information on-Line Network System, GIONS)·종합정보망시스템(Wide Information Network Services, WINS)·대회관리시스템(Seoul Olympic Management System, SOMS)·대회지원시스템(Seoul Olympic Support System, SOSS) 등이다.
경기운영시스템은 참가선수 및 임원의 등록관리, 경기운영 및 결과처리, 경기정보관리 등 3대 주요 업무를 중심으로 대회운영이 원활하도록 돕고, 다양한 정보를 신속 정확하게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종합정보망시스템은 전자우편 및 경기운영시스템으로부터 경기 정보를 전송받아 제공하는 경기결과 정보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세계 52개 나라의 공중 정보통신망 가입자가 즉시 경기결과를 검색, 인출할 수 있게 했다.
대회관리시스템은 올림픽의 인력관리·입장권관리·등록카드 발급관리·선수촌관리 등의 업무를 전산처리했다. 대회지원시스템은 숙박관리·수송관리·물자관리·연습장관리 등의 대회지원 업무를 전산처리했다.
서울올림픽의 안전대책을 주관한 안전조정 통제본부는 경찰과 군 등 약 11만 2000여 명의 안전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해 잠실 주경기장과 선수촌 등 300여 개의 대회 관련시설에 배치, 시설의 안전확보와 참가선수단의 신변안전을 완벽하게 보장했다.
국가안전기획부를 주축으로 관계부처 합동으로 편성된 안전조정 통제본부는 올림픽안전대책을 더욱 전문적이고 능률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선수단 신변보호대·경기장경비대·선수촌경비대·관련시설경비대·교통관리대·출입국대책반·소방안전대·식음료안전관리대·대(對)테러특공대·공항경비대 등 16개 기능별로 전문화된 특수 임무부대를 편성, 운용했다.
안전조정 통제본부는 국제테러 방지를 위해 미국·일본 등 우방각국과 공조(共助) 협력체제를 확립하고, 컴퓨터를 이용해 국제테러분자 6000명에 대해 신원정보와 600여 개의 국제테러조직 동향 등에 관한 자료를 분석, 활용했다.
공항·경기장·선수촌 등에는 금속탐지기 등 6만여 점에 달하는 각종 최신 과학장비를 설치해 올림픽의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위해요소를 사전 색출, 봉쇄했다. 올림픽기간중 테러도발과 돌발사태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경찰과 군으로 편성된 대테러특공대를 비롯, 폭발물 처리반과 기동타격대를 운용했다.
대테러특공대는 각종 형태의 테러사건을 빠르게 진압할 수 있는 올림픽 무역 교육 고도의 대테러 작전능력을 갖춘 정예요원으로 구성했으며, 1분에 6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소음기관단총, 레이저조준경 등 특수장비를 갖추었다.
또한, 위장된 폭발물을 찾아내기 위해 일단 의심의 여지가 있는 물건에 대해서는 전자식 청진기와 엑스레이 투시기로 철저히 검사했으며, 64마리의 폭발물 탐지견(探知犬)으로 하여금 콤퍼지션4와 같은 금속탐지기로 적발되지 않는 폭발물을 찾아내게 했다.
안전조정 통제본부는 소련 등 참가선수의 전용항공기와 선박에 대해서도 안전경비를 특별히 강화했으며, 참가선수단이 입출국하는 공항(空港)에 영접센터와 의전요원을 배치하고 전용 심사대와 검사대를 운영해 통관수속 지원 등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했다.
각국의 수상급과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등 주요 인사는 별도로 수행경호하고, 선수·임원 등의 차량에는 무장한 신변보호 요원이 함께 타고 다니며 기동보호했다. 적대관계에 있거나 분쟁 당사국의 선수 임원의 상호마찰과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숙소를 분리, 배치하고 이동할 때도 분리해 호송했다.
선수촌·기자촌·경기장에는 전자경보기·폐쇄회로 TV·금속탐지기 등 각종 과학경보 감시장비를 설치해서 위해 인물과 올림픽 무역 교육 위해 물품의 출입을 통제하고, 마라톤 등 도로경기와 요트경기장에는 지상 및 수중탐색과 공중감시를 연결하는 입체 경비체제로 임했다.
이와 같은 안전대책을 실시한 결과 대회기간 중 발생한 사고는, ① 위해 물품 소지자 적발 18건, 검거 13명, ② 올림픽 방해책동 시위 16건, 유인물소지 18건, 검거 53명, ③ 출입증 부정사용 발생 21건, 검거 21명, ④ 외국인 절도사건 9건, 검거 15명 등으로 나타났다.
서울올림픽에 참가하는 각국 선수·임원·심판과 IOC·IF·NOC 위원, 귀빈 및 보도진이 입국해서 출국할 때까지, 즉 9월 3일부터 10월 5일까지의 33일 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는 최적의 교통편의를 제공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선수 임원 1만 4000명, 심판진 2000명, 귀빈 5000명, 보도진 1만 4000명을 34개 경기장, 82개 연습장, 30개 호텔 및 각종 장소에 수송했다.
여기에 투입된 장비는 버스 776대(국방부지원 95대, 수송업체에서 임차 681대), 미니버스 309대(수송업체 임차 254대, 국방부 지원 55대), 승용차 1,340대(휘장사업 420대, 택시회사 지원 603대, 정부투자기관·금융기관·사기업체지원 152대, 국방부 지원 165대), 화물차 69대(화물수송 용역업체 선정), 특수차 62대(구급차·트레일러 등 수송업체 용역, 국방부 지원) 등 모두 2556대였다.
또한, 여기에 투입된 인원은 운전기사 3208명(단기 고용), 정비사 1572명(자원봉사자 포함, 업체 지원), 조직위원회 직원 34명(용역), 행정 및 운영요원 683명(임대) 등 모두 5497명이었다. 수송방법은 선수·임원·심판을 위해 116개 노선에서 순환버스를 운행했으며, 선수단 규모에 따라 전용차를 할당 운행했다.
보도진에 대해서는 기자촌·IBC·MPC·경기장 사이에 순환버스를 운행했으며, 요구에 따라 렌터카(유료)도 알선해 주었다. 귀빈에 대해서는 전용차를 할당, 운행했고 공식행사 또는 연회에 참석할 때는 단체수송을 했다.
숙박은 대상 인원 3만 9960명(선수촌·기자촌 투숙자는 제외)을 관광호텔(1만 6800명)·대회용아파트(1만 2960명)·지정 여관(9700명)·민박(500명) 등으로 분산, 투숙시켰다.
좀더 세분하면 IOC·IF·NOC 대표단은 본부 호텔인 신라호텔을 비롯한 20개 특급호텔(롯데·힐튼·하이야트·워커힐·프라자·조선·앰버서더·가든·팔레스·세종·코리아나·리버사이드·뉴월드·롯데월드·뉴서울·리베라·인터콘티넨탈·스위스그랜드·라마다르네상스·캐피탈)에서 투숙했으며, 올림픽 참가선수 가족 및 관광객은 대회용 아파트에서 투숙했다.
요금은 특급호텔이 8만 5000원∼11만 2500원, 1급 호텔은 5만 3400원∼6만 8500원, 2급 호텔은 3만 8000원, 3급 호텔은 3만 5000원이었으며, 대회용 아파트는 32평형이 9만 2000원, 43평형과 49평형이 각각 18만 원씩이었다.
대회기간중의 위생과 방역을 위해 의무지원센터를 설치했으며, 그 밑에 위생담당관·공해담당관·방역담당관을 두어 선수촌·기자촌·대회용 아파트·MPC·IBC·청소년캠프·올림픽공원·전 경기장, 경기·부산·대구·광주·대전 지역에 별도의 점검반을 상설 운용했다.
주요 임무는 ① 경기장 및 행사장 급식시설과 위생 지도 점검, ② 식품 및 조리기구 등에 대한 위생검사, ③ 식음료 검식, 검수 입회 확인, ④ 식품 부패 및 이상 발견시 올림픽 무역 교육 신속한 식품의 수거와 폐기 조처, ⑤ 식중독 사고 발생시 신속한 대처, ⑥ 환경위생 접객업소 위생점검 등이었다.
검사대상은 천연재료(어패류·육류·야채·과일류)·음료수(미네랄워터·수돗물·엽차)·가공식품(우유·빵·식품제품·어육연제품 등 유효기간 표시식품, 도시락)·조리기구(칼·도마·행주·개숫물) 등이었으며, 주 검사항목은 비브리오균·살모넬라균·대장균·포도상구균 등이었으나, 대회기간 중 위생불량 또는 방역대책 미비 등으로 인한 발병 사고는 전혀 없었다.
자원봉사제도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때 처음 채택된 제도로서, 공개모집에 의해 선발한 인원을 소정교육을 거쳐 올림픽기간에 운영요원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1986년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때 이 제도를 채택, 높은 성과를 올렸기 때문에 서울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채택했다.
1987년 9월 11만 6000명의 응모자 중에서 3만 명을 선발, 1년 동안의 교육(소양교육·직무교육·현장적응훈련·종합 예행연습)을 거쳐 서울올림픽에서는 통역 및 번역, 경기·사무 지원, 서비스, 출입통제 분야에서 완벽에 가까운 성과를 올렸다.
학생·직장인·가정주부·해외거주 동포 등으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는 식사제공과 1일 교통비 2000원씩을 받는 무보수로 헌신적으로 봉사함으로써 서울올림픽대회를 성공적으로 끝마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제94차 IOC총회가 서울올림픽이 개최되기 직전인 9월 12일부터 16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12일 오전 6시 사마란치 IOC위원장과 한국의 이현재(李賢宰) 국무총리 등 각국 대표 1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립극장에서 개회식을 가진 IOC총회는 13일부터 장소를 신라호텔로 옮겨 각종 현안 과제를 다루었다.
총회는 15일 회의에서 최고정책결정 및 집행기관인 집행위원회의 새 위원으로 한국의 김운용(金雲龍)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부위원장 겸 IOC위원을 선출했으며, 선임 올림픽 무역 교육 IOC위원으로 영국의 앤 공주, 콜롬비아의 피델 멘도사, 모리셔스의 램 뤼시 등을 뽑았다.
또한, 1994년 제17회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노르웨이의 릴리하마르를 선정했다. 제17회 동계올림픽 유치를 희망한 도시는 이 밖에 미국의 앵커리지, 스웨덴의 외스테르순드, 불가리아의 소피아 등 3개 도시가 더 있었으나, 투표 결과 릴리하마르로 결정되었다.
북한을 비롯한 알바니아·니카라과·쿠바·에티오피아·세이셸 등 서울올림픽에 불참하기로 한 6개국에 대한 처벌문제를 논의한 총회에서는 IOC에서 모든 회원국에게 지급하던 지원금(솔리타리티기금) 6000달러를 6개국에 대해서는 중단하기로 했으며, 다음 올림픽 출전권을 박탈하는 문제 등은 1990년 동경(東京)에서 열리는 IOC총회에서 다시 다루기로 했다.
이 밖에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서울에서 개최된 스포츠관계 국제회의는 IOC집행위원회(9.11∼9.12), IOC분과위원회(9.10∼9.12), ANOC집행위원회(9.16)를 비롯, 체조·핸드볼·배구·수영·역도·조정·사이클·유도·카누·레슬링·하키·요트·육상 등 각 경기단체별 국제연맹회의와 88서울올림픽 스포츠과학학술대회(9.9∼9.15, 단국대학교 천안분교) 등이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가장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던 회의는 올림픽의 공동개최 문제를 협의한 남북한 체육회담이었다. 1985년 2월 1일 사마란치 IOC위원장은 남북한 NOC에 각각 서한을 보내고 ‘북한선수단의 서울올림픽 출전 문제’에 관한 협의를 가지도록 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이 제의에 따라 1985년 10월 8일과 9일 이틀 동안 스위스의 로잔에서 제1차 남북한체육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우리 측은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을 선정한 IOC총회 결정과 올림픽헌장을 존중할 것”을 주장하면서 올림픽헌장 범위 내에서 배구·축구·핸드볼·탁구·양궁 등 일부 종목의 예선경기를 평양에서 분산, 개최하도록 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북한 측에서는 개최지를 서울로 결정한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고 반박하면서 ① 주최는 남북한 NOC가 공동으로 해야 하며, ② 대회 명칭도 ‘조선올림픽경기대회’ 또는 ‘조선평양 서울올림픽경기대회’로 하고, ③ 경기종목은 서울 12개, 평양 11개로 하며, ④ 개폐회식은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따로 거행해야 하고, ⑤ 텔레비전 방영권의 이익도 반반씩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IOC측에서는 양쪽 주장에 대해 “올림픽을 서울과 평양에서 따로따로 개최한다는 것은 올림픽헌장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에 절대로 불가능하며, 일부 종목의 분산 개최는 가능하다.”고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북한 측에서 본래의 주장을 계속 고집해 제1차 회담은 아무 결론 없이 끝났다.
이어 1986년 1월 8·9일에 제2차 회담, 1986년 6월 10·11일에 제3차 회담, 1987년 7월 14·15일에 제4차 회담을 가졌으나 북한측에서 끝내 공동개최를 주장해 모처럼의 남북한체육회담은 아무 성과 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 뒤 1988년 5월 13일 일본의 니가타[新瀉]에서 열린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북한선수단 단장이 “공동개최가 아니면 북한의 서울올림픽 불참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서울올림픽에 관한 북한과의 대화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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