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는 교회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절망스럽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절망감은 혼란스러움으로 진화한다. 교회의 모습에 대한 혼란스러움이다. 비정상적인 모습이 정상적인 것처럼 활개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욱 성경으로 돌아가 성령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교회의 본질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을 성경 안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요한계시록 2-3장의 과거 역사에 실존해 있던 일곱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경청함으로써 그 해답을 찾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신선한 통찰력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에베소 지역에 있는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 보자.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예수님
에베소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오른손에 일곱 별을 가지고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 묘사되고 있다(1절). 계 1:20에 의하면 일곱 별이란 일곱 교회의 천사들(새번역)이고,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들이라고 해석된다.
예수님은 천상적 존재뿐만 아니라 지상의 일곱 교회들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우주적인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지역 교회인 에베소교회를 주관하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이시다.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소유권을 대신할 존재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한 개인이나 집단이 교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교회는 그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으므로 한 개인의 뜻이나 계획이 관철되도록 하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 인식은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말씀하시는 예수님
그분이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에베소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권위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위 앞에 선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느꼈을 두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교회에 대한 소유권에 대한 배타성처럼 교회를 주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능가할 존재는 교회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담임목사도, 당회도 이 권위를 대신할 수 없다. 모두가 이 권위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권위를 대신하려고 한다거나 위임된 권위를 남용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께 도전하는 격이 되고 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말씀의 권위 앞에 엎드려야 할 존재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 말씀을 전하는 주체가 강단에서 목사이므로 목사 자신은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 대상에서 예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목사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 목사도 그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촛대는 무엇입니까?
그런데 슬픈 것은 성도들이 목사에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목사 자신은 온갖 병폐적 행위를 일삼으면서도 하나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존재라는 점에 있어서는 매우 너그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목사들 자신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입장이 아닌지를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어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목사의 독단적 결정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예수님의 권위 앞에 동등한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모습일 것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칭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에베소교회 공동체의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신다(2절).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예수님께서 그 교회를 모른다고 할 수 없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은 분명 한국교회를 알고 계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다고 할 때 한쪽은 환희와 기쁨,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확연하게 갈리고 말 것이다. 한국교회는 어떠할까? 이 대목에서 다들 '나는 예수님께 기쁜 일을 했으니 부끄러울 촛대는 무엇입니까?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기준이 없어 보인다. 누구든지 자신은 예수님께 칭찬 받을 일 했다고 만천하에 외쳐 댈 수 있을 것이다. 누구는 초호화 초대형 예배당을 건축해 놓고 나는 예수님 앞에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고 감격해 할 것이다. 그래서 그 기준을 성경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아신다고 한 것은 무엇일까? 먼저 그것은 그들의 행위, 수고와 인내이다(2a). 이것은 3절에서 쉽게 풀어서 반복 언급되고 있다. 먼저 '인내'는 '너희가 인내를 가지고 있다'라는 문구로 반복되고. '수고'는 '나의 이름을 인하여 견디다'라는 말로 반복된다. 그리고 그들의 수고는 '피곤해 하지 않는다'는 말과 연결된다(우리말 번역에 '게으르지 않다'라는 번역은 '피곤해 하지 않다'라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두 단어는 서로 동일한 어근을 가지고 있다. '수고'라는 단어에 해당되는 원어를 음역하면 '코포스'이고 '피곤하다'는 단어의 어근의 음역은 '코피아오'이다).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은 주님을 위해 수고했지만 피곤해하지 않았다. 끝으로 2절의 '행위'는 3절의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었다'라는 것과 연결된다. 그들의 행위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 세상의 도전 앞에 끝까지 버티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행위, 수고 그리고 인내는 교회에서 하는 일들을 두고 하는 표현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예수님 앞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초래되는 모습들에 대한 표현들이다.
2a와 3절의 이러한 의도적 연결의 중간에 2b에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A(2a)-B(2b)-A'(3절)의 구조를 형성한다. 곧 에베소 성도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의 핵심에는 바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낸 그들의 행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 가운데 그래도 평가할 만한 것들이 바로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악한 자들'이란 도덕적으로 악한 자들이라기보다는 바로 이어져 나오는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은 다른 말로 '거짓 사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자들은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다(참조 고후 11:13-15). 그러므로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들은 거짓된 교훈을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바로 이러한 자들을 시험하여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용납하지 않았다. 바로 그들의 수고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거짓된 가르침을 걸러내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것이다.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은 결코 쉽지 않은 그 일을 해냈고 예수님은 그들의 수고를 아시고 아낌없이 칭찬하신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처럼 에베소교회가 했던 일 가운데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 내기 위해 잘못된 가르침을 시험하여 분별해 내야 하는 것이 시급하다.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요즘 말로 바꾸어 말하면 자칭 목사라 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거짓된 가르침으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특별히 기독교 TV에 나와 설교하는 목회자들 중에 어떤 경우에 교회를 어지럽히는 가르침들이 난무한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당장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타나도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이 그 상태를 아시고 그 회복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책망하시는 예수님
다음 4-5절에서는 반전이 일어난다. 이러한 반전은 '그러나'라는 접속사에 의해 예고된다. 그 반전은 칭찬으로부터 책망으로의 반전이다. 책망의 내용은 이러하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4절). 이러한 단어의 사용에 의해 처음 사랑을 무의식 중에 상실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유기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처음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독자들은 쉽게 그 처음 사랑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단정할 가능성이 많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고 보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본문(2-3절)에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계신다. 그들은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해 낸 자들이다. 이것만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살아 있는 모습이 또 있겠는가?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처음 사랑이란 무엇이겠는가?
이것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 말고 상실했을 가능성이 있는 '처음 사랑'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여기에서 말하는 처음 사랑이란 성도들 사이에 존재했던 사랑을 가리킬 가능성이 많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올바른 교훈을 세우기 위해 거짓 교훈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사랑 없이 바른 것만을 주장한다면 얼마든지 사랑이 없는 공동체로 전락할 수 있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형제자매들 간의 사랑을 상실한 에베소교회 공동체의 실상은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처지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그렇게 규정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철저하게 배제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나가 없이 다른 하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힘들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말하는 것을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회 안에서 처음 사랑을 찾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그러한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 바른 교훈을 찾는 과정에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는 것에 있다.
한국교회는 차라리 바른 것을 추구하다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예수님의 이러한 책망을 받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한국교회에 과연 바른 신학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사랑을 버린 것은 그러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어디에서 떨어졌는가를 기억하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들을 행할 것을 촉구하신다(5a). 당연하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문제를 그냥 넘어 갈 수 없지 않은가?
여기에서 세 개의 중요한 동사가 주목된다: 기억하라; 회개하라; 행하라. 회개의 행위는 분명하게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는가를 보여주는 과거를 기억하는데서 출발한다. 과거를 기억할 때 회개의 출구를 발견한다. 그리고 처음의 행위들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상상 속에서 회개는 없다.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회개의 열매가 열린다.
그런데 이 문제는 예수님께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나 보다. 예수님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면(이 '회개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문구는 두 번 반복되어 강조된다) '촛대를 옮겨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5b).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촛대는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을 소멸시켜 버리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케 하시겠다는 경고이다. 사랑이 없는 교회 공동체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갖고 있을 수 없다. 사랑 없는 교회 공동체는 그 자체가 심판일 수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경고에 대해 한국교회는 자유로운가? 한국교회에 처음 사랑은 버리지는 않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된 것은 에베소교회와는 촛대는 무엇입니까? 좀 다른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바른 교훈을 세우려고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닌 것이 더욱 안타깝다. 차라리 그러했으면 바른 교훈이라도 얻어 위로라도 삼을 수 있을 터인데. 어느새 우리 한국교회에는 교회의 대형화가 큰 경향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그래서 작은 교회들도 대형 교회가 되고자 하는 경쟁 대열에 합류한다.
거의 모든 교회의 시스템이 성도들의 성경적 삶의 증진보다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 존재한다. 대형 교회들은 그들대로 서로 경쟁심을 갖는다. 그래서 더 크고 더 화려한 예배당을 지으려고 한다. 이러한 크고 화려한 예배당 속에서 군중들은 고독해 한다. 역으로 대형 교회는 간섭 받기 싫은 사람들의 천국이다. 사람의 관심이 못 미치니 편안하게 교회를 다닐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예수님의 도전은 이래저래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요청이다. 그래서 교회의 대형화는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된 상황을 초래한 중요한 이유이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칭찬하시는 예수님
6절은 또 다른 반전이 일어난다. 이 반전 또한 4절의 경우처럼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된다. 이 반전의 내용은 책망에서 다시 칭찬으로 돌아선다. 그래서 칭찬-책망-칭찬의 구조를 이룬다. 칭찬의 내용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했다는 것이다. 이 니골라당은 2:14-15에 의하면 발람의 교훈과 관련된다. 그리고 이 발람의 교훈은 2:20-23에 의하면 이세벨과 관련된다. 곧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발람과 이세벨과 같은 인물들이 자행했던 우상숭배와 음행과 관련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에베소교회가 위치한 에베소라는 도시는 황제 숭배를 비롯한 각종 우상숭배가 성행되었던 곳이었다. 이를 감안한다면 니골라당이란 에베소교회 안에 이러한 가르침을 교묘하게 도입하려 했던 자들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이들이 2:2-3의 거짓 사도와 관련된다면 그들은 우상숭배와 같은 이교적 행위를 적당하게 기독교적 진리와 혼합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미워하신다고 하시면서 이러한 자들의 교훈을 미워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칭찬하신다.
에베소교회 공동체도 찬란한 이교 문화의 영향하에 있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화적 업적은 오늘날도 널리 인정되고 그 영향은 모든 인간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깊숙이 파급되어 있다. 그런데 그러한 문화적 결과물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려 할 때, 혹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침범할 때 그들은 과감하게 그것을 미워한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한국교회 안에 기독교 진리와 세속적 물결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혼합되어 잠입해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세상은 무조건 악한 것이고 교회 안은 무조건 선한 것이라는 이교적 이원론에 사로 잡혀 있어 이러한 세속적 문화를 분별할 능력이 취약하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세속적 문화를 접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을 등지고 살 때 결과는 둘 중의 하나이다. 완전 고립된 삶을 살게 되든지, 아니면 세속적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그것에 저항할 방법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완전히 물들게 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어쩌면 우리 한국교회는 이 양 극단의 경우를 모두 경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내세워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러한 세속적 문화를 활용하는 데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분별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그러할 때 니골라당의 교훈 같은 교묘한 경우들을 분별해 내어 내칠 수 있는 내성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상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귀가 있는 자들이라면 누구든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사도들도, 목사들도, 장도들도, 신학교 교수들도 예외 없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기는 자에게는…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로부터 과실을 먹게 하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약속하신다(7절). 여기에서 '이기는 자'라는 문구는 왜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치열한 투쟁 가운데서 얻어지고 지켜질 수 있다는 의식 때문이다.
그냥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이기느냐 패배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에 순종하여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면 이기는 자가 되고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패배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전투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물론 다른 성경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존재한다). 이러한 요한계시록 말씀의 경향을 따라 한국교회가 직면한 이 현실을 영적 전투의 현장으로 선포해 보자.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생명나무를 먹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 열매가 가지는 의미로 '생명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의 지속적인 체험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영원한 구원으로 말미암은 충만한 생명에의 동참에 대한 표현과 다름 아니다. 이러한 약속은 22:2-4에서 미래적 종말의 시점에 주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결국 요한계시록 내에서 이러한 약속과 성취의 관계를 긴밀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심을 강변해주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러한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바라보며 매일 매일 삶의 현장에서 주어지는 도전 앞에 굴하지 않고 패배하지 않고 이기는 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주어졌으면 참 좋겠다.
이필찬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성경적종말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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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 RUTC 시대 : 교회를 살리는 사람들(행1;12-14) 12/16/2018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교회를 살리는 사람들로 힘을 얻고, 응답받고, 축복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먼저는 그 속에서 내가 힘을 얻고 살아나기 때문이다. 교회는 가정과 같다. 가정이 힘들고 무너지면 개인이 힘든 것과 같다. 계시록 1장에 교회는 세상에 빛을 밝히는 일곱 금 촛대와 같다고 했다. 교회가 힘을 잃고 어두워지면 세상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같이 망하는 길 밖에 없다. 정말로 중요한 이유가 마지막 있다. 우리 자녀들이다. 가정이 힘들면 자녀들은 전부 고통이고 상처다.
어떻게 교회를 살릴 것인가? 물론 교회는 주님이 살린다. 주님이 세우셨고(마16:18), 끝까지 주님이 보호하시고 주관하시기 때문이다(계1:11-20에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그리스도의 환상)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은 그 분의 권세를 의미하기도 하고, 그 분이 움직이시는 천사들, 그 분이 교회를 위해 세우신 주의 종들을 의미한다. 금 촛대 사이를 다닌다는 말은 그 분이 교회 안에 계셔서 교회를 주관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교회를 누구를 통해 살리시냐? 그 주님의 몸(엡4:12)으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가 힘을 얻는 만큼 교회가 힘을 얻고, 성도가 응답 받는 만큼 교회가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영적으로, 숫자적으로, 경제적으로도 계속 그 분이 주시는 힘을 얻고 증거를 누려야 한다)
우리 각자가 힘을 얻고 증인으로 서야 한다(개인 교회). 우리 가정이 힘을 얻고 증거를 얻어야 한다(가정 교회). 성전에 모인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증거를 얻어야 한다(현장 교회). 이 모든 교회가 합쳐져서 성전 교회를 이룬다.
더 크게는 전 세계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힘을 얻고 세상 살리는 교회로 서야 한다(우주적 교회)
지금 모든 교회들이 너무 무너지고 있다. 서로 비난하고 분쟁하든지 아니면 딴 것을 하고 있다. 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다. 마지막 때라 거짓 선지자, 배교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혼합주의, 종교 통합). 초대교회처럼 그리스도 전하다 이단으로 몰리고 핍박받은 일도 계속 되고 있다. 우리는 참된 교회를 세우고 살리는 축복 누리기를 바란다.
교회 살리는 길, 마가 다락방에서 세가지 집중이 이루어졌다. 이 축복 누리면 된다(그것을 “다락방 운동”)
-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교회이다. 그래야 우리 개인, 이 땅을 덮고 있는 어둠의 세력, 사단의 세력이 꺽인다.
1) 베드로가 지구상에 처음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했을 때 주신 언약이 그것이다(마16:16-19)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는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제일 먼저 주신 언약이다.
왜 그렇게 개인의 인생이 어려웠는지 아는가? 착하게 열심히 살아놓고 실패와 고통과 재난이 계속되는 이유다.
왜 그렇게 가정에 문제가 오고, 자녀들이 방황하고 그랬는지 아는가? 우리의 부족함, 실수, 무능도 있다.
아담과 하와가 실패하고, 첫번째 가정에 문제가 온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욕심 맞다. 불순종도 맞다. 그런데
그 배후에 속이고, 유혹하고, 실패하게 하는 옛뱀, 사단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한다(창3:1-5, 계12:9)
2) 그리스도가 오셔서 인생이 받을 저주와 형벌을 대신 받으시면서 그 마귀의 일을 멸하신 것이다.
그래서 타락하자마자 주신 언약이 창3:15이다(원시 복음). 이 복음이 깨달아질 때 귀신도 떠나고, 모든 문제의 근원이 끝나면서 치유도 일어난다. 인생의 변화도 일어난다. 참된 응답과 축복도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일3:8에 죄와 사단과 하나님의 아들이 하신 일을 정확히 설명하신 것이다.
3)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 선포하고,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께 집중해보라. 반드시 세가지 그리스도의 결론이 나온다
그 분이 모든 문제를 끝낸 것이다.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생명을 주신 것이다. 그 그리스도로 행복하라.
그 분이 모든 것을 준비해놓고, 나의 미래와 영원까지 책임지시겠다는 것이다. 그 그리스도로 충분한 것이다.
그 분이 나를 승리하게 하고, 나를 증인으로 세워 세상을 살리시겠다는 것이다. 그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집중할 때 어느날 내 인생의 모든 영적 문제가 끝나고, 갑절의 축복이 오는 것이다(욥42:10)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에 집중하는 교회이다.
1) 그리스도를 깨달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의 언약을 주셨다(마16:19)
땅에서 무엇을 매든지 하늘에서 매이고, 무엇을 풀든지 하늘에서 푼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비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정말 기도하면 단 하나도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계8:4에 우리의 기도를 모아 천사들이 하나님 보좌 앞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2) 그때부터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것이 행2장의 오순절 성령의 역사다.
열흘간 기도 집중했는데, 불과 바람 같은 성령이 역사한 것이다. 개인이 바뀐다. 용기가 생기고, 힘이 생긴다. 눈이 열리고, 문들이 열리면서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결국 시대를 살린 것이다(행1:8 언약의 성취)
3) 모든 성도들, 특히 렘넌트들은 기도 집중하는 시간 만들어 기도 훈련해야 한다(정시기도, 무시기도, 24기도).
그리스도를, 언약을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알면 안 된다. 성령이 주시는 실제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사단은 계속 여러 문제와 어려움, 갈등으로 힘을 빠지게 할 것이다.
영적 써밋(영적 힘을 가진 자), 기능 써밋(전문성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 유일성으로), 문화 써밋(문화, 흐름을 바 꾸고 세상 살리는 자)은 그때 시작되는 것이다. 꼭 기도의 사람들로 일어나기를 바란다.
-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권세와 능력으로 현장을 살리는 일에 집중하는 교회이다.
1) 마28:18-20에 주님이 승천하면서 마지막 주신 결론의 언약이 무엇인가?
그냥 가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분명히 준비하신 제자 있다는 것이다.
2) 이 언약을 가지고 마가다락방 교회에 모인 성도들이 성령의 힘을 얻고 한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계속 전도의 문을 여신 것이다. 15개국의 다민족 문을 여셨다(행2:9-11). 핍박이 오지만 흩어져서 사 마리아 교회(행8장), 안디옥 교회(행11장)가 세워진다. 가는 곳마다 촛대는 무엇입니까? 제자를 찾아 세계복음화를 한 것이다.
세계복음화의 언약을 잡고, 그 비전과 꿈을 품고, 그림을 그리고, 하나씩 도전하며 응답 체험해보라(CVDIP).
3) 전도와 선교할 만큼 힘 얻고, 응답을 받으라. 그것이 100년의 응답, 천년의 응답이다.
어디를 가든지 두 사람만 모이면 다락방 하고, 멀리 살면 지교회 할 만큼 힘 얻고 응답을 받으라.
99% 현장에는 복음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교회들이 다 놓치고 있으니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한다.
결론-세가지 집중하는 교회이다. 오직 그리스도에 집중하고, 기도에 집중하고, 현장 살리는 일에 집중하는 참 교회를 세우는 일에 쓰임받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회를 살려 후대와 세상 살리는 자들로 축복하실 것이다.
촛대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계시록 1장 하나님 말씀 중에서 촛대 사이의 인자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촛대 사이의 인자”(계 1:9-20)
♣ 명제 : 촛대 사이의 인자가 이 시대의 교회를 통치하신다 .
♣ 목적 : 나는 지금 인자의 통치함을 받고 있는 성도인가 깨달아야 한다 .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인자는 구약의 성막을 연상하게 합니다 . 성막에서 흰 옷을 입고 촛대 사이에 있는 자는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 성막은 예수님을 계시하고 있는데 그곳에 다니시는 인자는 바로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 시대의 모든 교회를 주님께서 다니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 사도 요한은 앞으로 될 일을 주님으로부터 명령을 받게 됩니다 .
( 계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도 요한은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에 의해 밧모 섬에 유배되게 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고난을 받게 된 것입니다 . 바로 촛대 사이의 인자를 증거 하다가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이 시대에 고난이 있다고 해서 복음을 버려서는 안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전파해야 합니다 .
‘밧모’는 פטיש(팟티쉬 6360) 탕탕치다. 라는 어원에서 유래하여 매질, 방망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 섬에 유배되어 세상의 황제에 의해 탕탕 망치로 방망이로 맞듯이 매질을 당한 것입니다 . 고난과 고통의 세월을 밧모 섬에서 보내지만 예수님은 요한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소망을 주시고 있습니다 . 요한이 유배에서 풀려난 것이 교회사의 ‘ 아버지 ’ 라고 불리는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네르바 황제 때 풀려나게 됩니다 .
( 계 1:10-11)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 서머나 , 버가모 , 두아디라 , 사데 , 빌라델비아 ,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사도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 이 날은 바로 예수님을 만난 날입니다 .
‘감동하여’ γινομαι(기노마이 1096) 생겨나다, 만들어지다, 행해지다, 일어나다, 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자신감이 생겨났습니다. 유배지에서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성령님께서는 감동을 주고 은혜를 주어 다시 새 힘을 받게 한 것이며 앞으로 펼쳐나갈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 이렇게 요한이 감동을 받은 사실이 있었으며 이 사건은 과거에 이미 있기로 작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 요한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앞으로 환난과 핍박받고 있는 교회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
사도 요한이 들은 소리는 나팔소리였습니다 . 이 소리는 바로 복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
‘나팔’ שופר(쇼파르 7782) 나팔, 뿔 나팔,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שפר(샤파르 8231) 빛나게 되다, 아름답게 되다, 기쁘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은 바로 주님의 복음의 음성입니다 . 이 음성을 듣는 자마다 죽었던 자들이 빛 가운데로 나와 빛나게 되며 영혼이 아름답게 변하고 심령이 기쁘게 됩니다 . 복음 외에는 나의 영혼을 빛나게 할 것이 없으며 나의 상한 심령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 여호수아 군대는 여리고성을 무너트릴 때에 나팔을 불었습니다 . 이 복음의 나팔은 견고한 성을 무너지게 합니다 .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던 자들도 복음의 나팔소리에 변하게 됩니다 .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의 일곱 교회에 보낼 메시지를 주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 주님께서 보여주신 환상들을 편지에 적어 보냅니다 .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교회의 통치자입니다 . 그럼 나를 통치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 교회에서 주님은 나에게 메시지를 말씀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
( 계 1:12-13) 몸을 돌이켜 나에게 촛대는 무엇입니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요한이 몸을 돌이켜 자신에게 말한 음성을 알려고 할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게 됩니다 . 그런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
‘촛대’ מנורה(메노라 4501) 등잔대, 등잔,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베틀 채, 속박, 멍에, 라는 뜻에서 온 것입니다. 또한 ניר(니르 5214) 경작하다, 기경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촛대는 성막에서 어둠을 밝혀주는 도구입니다 . 이 시대의 어둠에 갇힌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죄에 속박되어 죽어 있는 자들의 멍에를 끌러주고 베틀 채와 같은 주님의 고난이 나를 살리신 것입니다 . 그렇게 되어 나는 세상의 추하고 더러운 곳에서 새롭게 복음으로 인해 경작되어 땅을 갈아 업어 기경하게 된 것입니다 . 이것은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새롭게 바뀌게 하는 것입니다 . 이 역할을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촛대를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
‘옷을 입고’ ενδυω(엔뒤오 1746) 옷을 입히다, 옷을 입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볼 때 성막에서 사역하는 대제사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흰 옷을 입고 사역하는 대제사장의 모습입니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모든 옷을 벗고 에봇으로 갈아입고 성막에 들어가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위해 십자가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이 옷을 입었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완전한 옷을 입으신 것입니다 . 또한 장소가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골고다 언덕입니다 .
이렇게 죽으심으로 많은 죄인들이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 이 옷을 입은 것은 이미 예정된 사건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 주님께서 이 옷을 입으시므로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사역 때문입니다 . 이 십자가의 사건은 목적이 있습니다 . 예수님이 옷을 입으신 것은 목적이 있습니다 . 바로 죽은 영혼들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옷을 입으셨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
인자는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습니다 . 이것은 영원한 진리의 복음을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 진리의 허리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 바로 예수님의 진리의 복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 예수님의 마음에는 오직 진리밖에 없습니다 .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 나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을 항상 간직해야 합니다 . 이 말씀을 꼭 전해야 합니다 .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사명입니다 .
( 계 1:14-15)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인자의 모습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다고 했습니다. 흰머리털은 대제사장이 쓰는 관을 상징합니다. 그 관에는 יהוה קדש(아도나이 코데쉬)‘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사상은 오직 천국복음으로 가득 차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룰 생각밖에 없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의 눈이 불꽃같은 것은 무엇입니까 ?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판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대제사장의 가슴에는 우림과 둠밈이 있었습니다 . 이것은 판결 흉패입니다. ‘ 흉패’ חשן(호셴 2833) 내포하다, 번쩍이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순간적인 판단을 하셔도 잘못된 판단이 없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림’ אורים(우림 224) 밝다, 빛나다, 비추다, 영화롭다, 광채 나다, 라는 뜻입니다 . 제사장은 가슴에 흰 돌을 넣게 됩니다 . 이것이 바로 우림입니다 . 이것을 판결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밝게 비추이게 되고 빛나며 영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 죄가 없다고 판결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 주님의 보혈로 완전하게 죄 씻음 받은 자들은 우림의 판결을 받은 자들입니다 . 이 사람은 오직 세상에서 주님을 나타내며 주님을 위해 사는 인생입니다 .
‘둠밈’ תמים(툼밈 8550) 사망하다, 그치다, 황폐되다, 멸망하다, 진멸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돌은 검은 돌입니다. 대제사장의 판결에서 검은 돌이 나오면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죽게 됩니다. 죄가 있다고 판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이 사람은 멸망당하고 진멸되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 주님이 판결을 내리실 때에 율법적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은 결국 검은 돌의 판결을 받아 영원히 사망의 불 못으로 던져지고 영혼이 황폐하여 멸망당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둠밈은 완전하다 , 라는 뜻도 있습니다 . 완전하게 죽음으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
인자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과 같다고 했습니다. ‘단련한’ צרף(차라프 6884) 단련하다, 연단하다, 청결하다, 순전하다, 라는 뜻입니다. ‘발’ מרגלה(마르겔라 4772) 비방하다, 모함하다, 허물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발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비방하며 모함하고 허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에 오르실 때에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비방했던 것입니다 . 그중에 나는 어떻습니까 ? 바로 나도 주님을 믿기 전에는 주님에 대해서 욕하고 비방했던 인물입니다 . 이런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연단받아 선택된 모든 백성들을 청결하게 하고 순전하게 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 이것이 바로 주님의 빛난 주석과 같은 발입니다 . 나를 위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에 오르신 그 발 나를 위해 대못을 발에 박히시고 나를 순결하게 하신 그 발입니다 .
( 계 1:16-17)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주님께서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가지고 계시고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고 있습니다 .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교회에 복음을 전파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 말씀은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날 선 검은 바로 천국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 주님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 이것은 구약의 모세를 떠오르게 합니다 .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에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해와 같은 천국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얼굴에서 빛이 나오는 것입니다 . 이 복음을 통해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 나도 주님의 천국복음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 이 빛을 받을 때에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
사도 요한은 주님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 이것은 주님의 권위에 경외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 바로 속죄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 주님을 만날 때에 속죄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 오른손을 주님이 얹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 바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라는 의미입니다 . 교회의 사명은 주님의 영광과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 이 사명을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
( 계 1:18-19)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전에 죽었다가 지금은 살아 있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삼일 만에 살아나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 분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 주님은 요한에게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촛대는 무엇입니까?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합니다 . 주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어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 계시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깨닫고 알라는 것입니다 . 주님의 말씀은 절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
( 계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사도 요한이 본 것은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고 했습니다 . 그런데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말하는 것이고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주님이 풀어주시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일곱 별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 바로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 이것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교회의 목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 이 자들은 오직 주님이 전파하셨던 천국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 주님이 주셨던 비밀의 계시의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 이 사명을 모든 교회의 목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 현재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 이곳에서 성도로 섬기는 자도 있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이제 나는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인자를 증거 해야 합니다 . 그분이 교회를 통치하시며 치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지금 나는 누구와 하나가 되어 있습니까 ? 세상과 결탁하고 있습니까 ? 아니면 영원한 복음을 전파하시는 주님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 나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 오직 천국복음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입니까 ? 아니면 세상의 학문을 전하는 교회입니까 ? 우리가 이 시간 증명해 보아야 합니다 . 이 시간에도 주님은 현재 이 교회를 거니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 나의 예배를 보시고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예배 중에 거니시고 있는데 나의 심령을 모두 보고 계시는데 어떻게 내가 주님을 떠날 수 있으며 이 시간을 헛되게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까 ? 이 시간을 오직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요한계시록 20장 설교말씀] “천년왕국”(계20:1-6)
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계시록 20장 설교말씀 중에서 천년왕국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천년왕국”(계 20:1-6) ♣명제: 천년은 성도에게 왕 노릇하는 기간이며 사탄은 결박되는 기간이다. ♣
촛대는 무엇입니까?
본문 5 절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 ‘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
이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염두에 두면서 , 그러면 과연 우리 교회의 촛대는 옮겨진 것인가 아닌가 , 아니면 촛대가 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촛대에 불이 활활 잘 타고 있는 것인가요 ? 이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 오늘 에베소교회로 전달하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메시지 안에서그 확인 여부의 기준을 우리가 한번 찾아봅니다 .
▶‘촛대가 옮겨졌다 ’ 이 얘기는 꽤 자주 하던 얘기였어요 .
예를 들면 영락교회가 이전에는 장로교단 통합측에서 가장 큰 교회 아니었습니까 ? 그리고 대한민국의 개신교를 대표하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 그렇게 제일 큰 교회였다가 제가 영락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길 때만 해도 , 더 큰 교회가 여기저기 많이 생겼습니다 . 저는 영락교회를 고등학교 시절부터 다녔으니까 , 과거에 교회에 정말 많은 교인들이 오고가고 할 때 수요일 저녁예배 같은 때도 줄을 서지 않으면 못 들어갔습니다 . 그런 때가 있었고 , 또 제가 영락교회 부목사로 섬길 때는 그때와는 많은 차이가 있어서 그렇게까지 교인들이 많이 오시지는 않을 그럴 때여서 , 그런 상황을 대부분 알고 있는 부목사님들이나 아니면 중책을 맡고 있는 교인들도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하게 되는 상황이 되면 , ‘ 촛대가 강남에 있는 소망교회로 옮겨진 것인가 ?’ 그러다가 이제는 소망교회보다 더 큰 교회가 생겼지요 . 그때의 촛대가 옮겨졌다고 하는 말의 기준은 교인이 물밀 듯이 쇄도해 들어오는 그런 상황이 기준이었던 것 같아요 . 쉽게 말하면 숫자적인 부흥이 일어나느냐 , 일어나지 않고 있느냐 , 그 기준을 두고 얘기했던 것 같아요 .
▶그러면 여러분 , 여러분이 갖고 계시는 기준에서 ‘ 촛대가 옮겨졌다 안 옮겨졌다 ’ 이것을 알 수 있는 내용 / 기준은 도대체 뭡니까 ? 여전히 숫자적인 부흥이에요 ? 그런데 숫자적인 부흥이 막 일어나면 이곳에 촛대가 있는 교회라면 , 그러면 이단들이 숫자가 늘어나는 건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사상적으로 완전히 이단인 그런 종파들에서 교인이 막 수백 만 씩 늘어나는 이유는 뭡니까 ? 촛대가 있기 때문이에요 ? 이것이 참 궁금합니다 .
▶여러분 , 촛대가 옮겨지는 것은 그 내용은 모르지만 , 상징적으로 비유적인 언어 안에서 우리가 얘기한다면 , 결국은 촛대에 붙일 불이 없기 때문에 촛대가 의미가 없는 거예요 . 그래서 그 촛대를 옮긴다는 거죠 . 결국 촛대를 옮긴다는 뜻은 , 교회의 머리 되시고 주인 되시는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로 인정하시지를 않는다는 얘깁니다 . 하 , 이거 무서운 얘기에요 , 진짜 무서운 얘기에요 . 그냥 계시록에 나와 있는 에베소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이다 , 그렇게 성경공부 하고 넘어갈 얘기가 아니고 , 반드시 교회 촛대를 옮기실 수도 있다는 이 사실이 우리 교회에 적용이 돼가지고 , 내가 출석하고 있는 우리 교회의 상황은 , 어떤 상태인가를 알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 그걸 알라고 에베소교회에 대한 메시지를 주신 것 아닙니까 ? 우리 교회에서도 촛대가 옮겨질 촛대는 무엇입니까?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 촛대가 옮겨질 수 있는 상태냐 아니면 촛대가 건재할 수 있는 상태냐를 구분해서 , 아니면 시정하라고 주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 그러므로 오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핵심적인 태도는 ,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교회가 촛대가 옮겨지는 교회냐 / 촛대가 건재할 수 있는 교회냐를 알아내야 되는 거예요 .
▶그리고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로 이건 마치 , 얼마 전에 뉴스에서 나온 교황님과 관계되는 이야기들 중에서 , 교황청에서 마피아와 손잡고 돈세탁 하는 부패가 만연하는 걸 보고 이 새로운 프란체스코 교황께서 마피아를 파문해버렸습니다 . 파문이라는 게 무서운 것 아닙니까 ? 더구나 가톨릭 세계에서는 . 근데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파문시켜버리는 겁니다 . 주님의 교회 울타리 바깥으로 내몰아버리시는 겁니다 . 아 , 이건 무서운 거죠 . 오늘 이 에베소교회에 주신 말씀 속에 나오는 이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 , 촛대를 옮기는 것이 교회의 파문이라면 , 결국 촛대가 옮겨진다는 것은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본질을 상실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
▶근데 이게 교회 파문과 같은 그런 것이라면 에베소교회로서는 좀 많이 억울한 경고를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 교회라고 하는 것이 어차피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 잘못과 오류가 없을 수 없습니다 . 그런데 촛대를 옮기신다는 이 마지막 말씀 , 교회를 파문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해버리신다는 것은 좀 지나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 왜 그러냐 하면 , 주님께서 직접 언급하신바대로 에베소교회는 나름대로 , 다른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잘한 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내가 안다 , 그리고 거짓 사도들과 이단사상을 적절하게 대처해서 배격한 것을 내가 안다 . 이거 훌륭하지 않습니까 ? 그런데 문제는 처음 사랑을 잃었다는 거예요 . 그러나 다른 것들은 잘되고 있지 않습니까 ? 이단사상과 거짓 사도들을 가려내는 일은 아무 교회나 합니까 ? 굉장히 곧고 바른 정통교리를 알고 붙잡고 있어야 되는 일이잖아요 . 그리고 행위와 수고와 인내라고 하는 것은 , 그들이 말로만 교리를 인정하고 그러는 게 아니라 , 교리를 따라 행동하고 또 그대로 함에 있어서 외부적인 박해와 맞서야 되었기 때문에 수고도 하고 , 그 어려움 가운데서 인내했다는 얘기에요 . 뭘 더 바라겠습니까 ?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 사랑이 부족하다면 , 처음 이 에베소교회가 바울사도의 3 차 전도여행 때 3 년 가까운 세월을 머물며 말씀을 전함으로 생긴 교회 아닙니까 ? 그때 가졌던 사랑이 없다고 그러면 , 그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시면 되지 , 어떻게 교회 파문에 해당되는 내용의 말씀 , 촛대를 옮긴다는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쉽게 하시느냐 이겁니다 . 부부싸움은 어느 부부에게나 다 있어요 . 그러나 부부싸움 할 때마다 이혼하겠다는 마지막 말을 해버리면 정말로 이혼하게 됩니다 . 방귀가 잦으면 뭐가 나온다고 , 자꾸 말을 그렇게 하면 이혼하게 돼버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 에베소교회는 내용적으로는 바울이 세운 게 아니라 주님이 세우셨어요 . 이 말씀은 에베소교회와 관련된 그 누구보다 , 주님께서 제일 사랑하신다는 얘기에요 . 제일 사랑하시는 분께서 이렇게 얘기하실 때는 그 주님의 판단 속에 지나치심도 / 모자라심도 없는 거죠 , 오류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
▶그렇다면 대체 이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 말씀이기에 교회를 파문시키는 것에 해당되는 촛대를 옮긴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걸까요 ? 한 마디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 사랑이 이데올로기로 대체돼버린 상태입니다 . 사랑이 이데올로기로 대체돼버리면 주님께서 교회를 파문시켜버린다는 얘깁니다 . 대체 사랑이 뭡니까 ? 오늘 에베소교회에 메시지를 주실 때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어떻게 묘사하셨나 하면 , 앞의 1 장에서 계시되었던 인자의 모습 중에서 , 인자의 여러 부분 부분의 모습을 계시와 환상을 통해서 요한에게 보여주셨잖아요 , 그 내용을 다 기록한 다음에 마지막에 ‘네가 본 것은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촛대다 ’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 그래서 우리가 일곱별의 비밀이 뭔가를 얘기했어요 . 일곱별은 사자를 말하고 , 일곱 촛대는 교회를 말한다고 그랬잖아요 . 이 별의 비밀이 뭡니까 ? 교회가 지금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 때문에 파문의 위기에 처해있는데 , 이 첫사랑이 무엇인가 그 내용을 찾아가고 있는 거예요 . 첫사랑이 없이는 교회가 본질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교회가 아니다 ,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의 영역으로부터 파문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인데 , 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해주는 첫사랑이 뭐냐 하는 얘깁니다 .
▶이 첫사랑의 내용이 일곱별의 비밀과 관계가 된다는 겁니다 . 별의 비밀이 뭐라고 했습니까 ?
하늘에는 별이 스물네 시간 일 년 365 일 떠있습니다 . 그런데 해가 떠있거나 인공의 다른 빛이 눈에 들어오는 상태에서는 하늘에 별이 아무리 많이 떠있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 태양이 떠오를 때도 하늘에는 북두칠성도 북극성도 다 있습니다 , 근데 안 보여요 . 이게 바로 비밀이라는 겁니다 . 이 세상은 원래 창조되기를 , 시간과 공간의 커튼에 의해서 하늘과 막히게 창조되었습니다 . 그래서 이 세상 안에서 밝음을 얻으려면 , 밝음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말해야 되는지 , 나는 내 인생을 어디로 향해 가야 되는가 , 이런 것들이 다 밝음이에요 , 빛이 있어야 아는 겁니다 . 우리 마음에 빛이 비쳐지는 건데 , 이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커튼에 가려져서 빛이 없는 세상이에요 . 그래서 선악과를 세워두고 따먹지 말라고 한 게 바로 그렇게 표현이 된 겁니다 .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 내가 무엇을 말해야 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는 반드시 시간과 공간이라는 커튼 바깥에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만 수입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 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 안으로 수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 빛들이 수입됩니까 ? 시간과 공간의 세계 바깥 , 그곳이 하늘인데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께 마음이 스물네 시간 가서 붙어있어야 ,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내 몸이 빛 아래서 말할 수 있고 행할 수 있고 인생을 영위할 수가 있는 겁니다 . 그런데 마음이 하나님께 가서 붙어있는 이 상태가 뭡니까 ? 이게 바로 사랑인 거예요 . 마음이 거기 붙어있으니까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내 마음이 없고 , 따라서 뜻도 힘도 없어요 , 왜냐하면 하나님께 가버렸기 때문에 .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 내 마음이 하나님아버지께 가 붙어있는 겁니다 , 거기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
▶그 마음이 머물러 있을 때 이 지상에서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현상이 있어요 .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뭡니까 ? 항상 기뻐하는 것 ,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 , 범사에 감사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겁니다 . 항상 시간과 공간의 세계 바깥에 계시는 하나님 때문에 기쁘기 때문에 , 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바라지 않게 되고 , 그럼으로써 그 사람들의 요구에 관심을 갖게 되는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 사랑이 뭐라고 했지요 ?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이 가서 머무는 겁니다 . 시간과 공간의 세계를 마음이 떠나는 겁니다 . 하나님께 머물러 있으면서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면서 이 시간과 공간에서 주어지는 상황에 상관없이 항상 기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머물러 있으면서 항상 하나님과 대화합니다 .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일들을 주장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 그럴 때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에게 관심이 기울여지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 이게 바로 사랑인 겁니다 . 그러면 사랑의 핵심은 뭡니까 ?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과 생방송 할 때처럼 라이브로 연결된 상태가 바로 사랑이라는 거예요 .
▶그런데 이게 끊어져버렸습니다 . 이게 끊어져버렸는데 어떻게 이단사상을 배격할 수 있고 거짓 사도들을 가려낼 수 있고 ,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나타날 수 있겠는가 ? 이게 끊어졌는데도 가능하다는 거예요 .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 지금도 살아계시면서 이 순간을 내려다보고 계신 하나님과 라이브로 연결이 돼서 사는 것이 사랑이고 , 그렇게 연결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 삶에 나가서 ,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어디에서든 간에 하나님과 연결되어있는 상태에서 내가 촛불의 심지가 돼서 하늘의 빛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 하나님의 생각 ,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의 행동과 계획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 그런데 이 연결이 끊어졌는데도 , 도대체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이게 연결된 것 같은 행동들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
▶사랑이 이데올로기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 여러분 , 이데올로기가 뭐죠 ? 쉽게 말하면 , 내 생각과 행동과 생활방식을 결정하는 관념입니다 . 자 , 그러면 교회 안에서 관념이 된 것이 뭡니까 ? 예를 들어 , 성수주일 , ‘ 주일날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라 , 빠지지 마라 ’ 이게 이데올로기화 돼버렸습니다 .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어때야 되는 겁니까 ? 마음이 하나님께 가있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마치 연인 사이의 남녀가 만날 때 , 내가 저 남자 ( 여자 ) 를 만나야만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 몸과 몸이 만나기 전에 이미 마음이 그쪽에 가있습니다 . 이게 사랑이에요 , 마음이 가있는 게 . 그런데 성수주일은 어떻게 관념화 되었는가 하면 , 성수주일을 하지 않으면 일주일 동안 평안하지 않다 , 주일날 골프를 쳐야겠는데 , 예배를 드리지 않고 골프를 치면 골프공이 잘 안 맞는다 , 그러니까 7 시에 드리는 1 부 예배라도 참석해서 예배를 드린 다음에 골프를 치러 가야 된다 . 목사님들이 계속 성수주일을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겁니다 . 성수주일을 하라고 얘기할 게 아니라 사랑을 회복시켜야 되는 거예요 . 시간과 공간 안에 머물러 있는 교인들의 마음이 더 이상 시간과 공간 안에 머물러서 가짜로 마귀가 만들어낸 빛들을 쫓아가지 말고 마음이 이 시간과 공간을 떠나 하나님께 가있도록 만들어줘야 되는 겁니다 , 그렇게 이끌어야 된다는 거예요 . 근데 성수주일 하라고 자꾸 얘기를 하는 겁니다 .
▶전도도 마찬가지에요 , 전도가 이데올로기가 돼버렸습니다 . 자꾸 전도 하라고 그래요 , 자꾸 . 그래서 전도하면 상을 주고 그럽니다 . 그런데도 잘 안돼요 . 그런데도 개신교 전체가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 뭐 천만 명이다 이렇게까지 얘기했었는데 , 지금 실제로 600 만 명 , 500 만 명 선까지도 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 자꾸 줄어들어요 . 그런데 여러분 , 수가 성 여인은 어떻습니까 ? 주님을 만나가지고 이 여자의 죽지 못해 사는 사막 같이 피폐해버린 심령이 주님으로 채워집니다 . 이때 주님은 한 마디도 안 하셨어요 , 가서 전도하라고 . 이 여자가 물동이까지 버려두고 , 다시 말해서 자기의 삶을 위해서 필수적인 행위들을 다 제쳐놓고 마을로 들어가서 자기를 비난하던 마을 사람들이 촛대는 무엇입니까? 싫어서 혼자 따로 살던 여자가 , 자기를 비난하는 이유인 자기의 부도덕함을 입으로 꺼내서 얘기하면서 전도해가지고 , 수가라는 마을 전체를 전도해버립니다 . 이게 첫사랑이에요 , 이 여자가 우물가에서 주님을 만난 게 첫사랑이에요 . 그리고 교회는 계속해서 마음을 이 여자가 주님께 두고 있는 것처럼 세월이 10 년 20 년 30 년이 지나도 , 그 누가 믿더라도 계속 마음을 그렇게 드리도록 이끌어야 되는 겁니다 . 이게 바로 일곱별의 비밀이 수행되는 거예요 .
▶그러면 어떻게 일곱별의 비밀이 수행되면서 마음이 시간과 공간 바깥으로 나가게 됩니까 ?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람들에게 통용되고 있는 가짜 불들이 꺼져야 되는 거예요 . 그래야 별이 보이는 겁니다 . 그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 , 교회의 사자들이 하는 거예요 . 교회 사자들이 교인들을 앉혀놓고 계속해서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공의 불빛들 , 돈을 많이 벌어야 잘산다 , 학력이 좋아야 취직이 잘된다 , 이런 식으로 세상에서 통용되는 가치관들 , 이게 다 가짜 불들이에요 , 하나님과 연결되면 잘사는 거죠 , 잘산다는 게 적합하게 산다는 얘기죠 . 어떻게 돈을 많이 번다고 잘 삽니까 ? 돈 많이 벌어서 망한 사람 많아요 . 돈이 안 벌리는 게 망하는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 돈이 잘 벌려서 망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 심령도 망하고 가정의 형제간의 우애도 깨지고 그러는 거예요 , 돈 많이 버는 바람에 . 하루 세끼 먹고 내가 할 일 하고 있으면 감사한 줄 아세요 , 돈 돈 하지 말고 . 이렇게 잘못된 세상의 가치관들이 들어와 가지고 교인들의 마음을 밝히고 있을 때 , 그 불을 꺼줘야 되는 거예요 . 그 불을 꺼줌으로써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게 , 왜냐하면 하늘의 불은 이 지상이 어둡지 않으면 안 보이기 때문에 마음속에 이 세상의 가치관들의 불빛들이 반짝거리면서 , ‘난 이렇게 살아야 돼 , 저렇게 살아야 돼 ’ 라는 생각이 있는 한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 그걸 꺼줘야 돼요 .
▶그걸 꺼주는 게 뭡니까 ? 십자가 말씀이에요 . 사도바울의 ‘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린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 는 게 무슨 말입니까 ? 자기 혼자만 알겠다는 거였어요 ? 자기가 그것만 아니까 말씀도 결국 그것만 전하는 겁니다 . 그게 문자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 내용을 들춰보면 다 십자가 얘기에요 . 왜 그랬습니까 ? 불을 끄는 거예요 , 계속해서 불을 꺼서 마음이 시간과 공간의 커튼 바깥에 계시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겁니다 . 그래서 마음이 그곳에 가서 연결이 돼있어야 이 지상에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불의 표현들이 되는 거예요 . 그래서 촛대가 의미가 있는 거예요 . 왜냐하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참 빛은 언제나 하늘에만 있어서 , 수입되어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에 . 근데 이 시간과 공간의 커튼 안쪽에서 마귀가 만들어낸 불들 때문에 , 그걸 못 보고 있으니까 그걸 꺼줘야 되니까 꺼줘야 연결이 되는 거예요 , 시간과 공간 바깥에 계신 하나님과 .
▶그래서 거짓 사도를 가려낸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 모든 교리가 결국은 다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나온 말씀들입니다 . 근데 이 연결은 끊어지고 관념만 남은 거예요 , 지식만 남은 겁니다 . 지식만 갖고 있어도 이단을 가려낼 수 있어요 . 왜냐하면 이단과 거짓 사도들도 지식을 내뱉고 있으니까 , 그 지식과 지식을 비교해보면 잘못된 지식이라고 해서 거짓 사도를 가려낼 수 있습니다 . 대단한 것 아닙니까 ? 그러나 이 대단한 게 소용없다는 겁니다 , 첫사랑이 끊어져버리면 . 교리도 알고 있고 , 전도다 성수주일이다 , 이런 관념에 의해서 행동은 계속 성수주일 하고 전도를 하겠다고 애를 쓰고 있고 , 온갖 행위와 말을 다 하고 있지만 라이브 연결이 끊어져버렸습니다 .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 , 모든 생각과 행동이 관념으로부터만 나오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행동과 생각이 아니라 관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면 , 공산주의가 관념으로부터 얼마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내하고 혁명해 나갑니까 ? 그렇게 혁명까지도 할 수가 있어요 , 관념만으로도 . 교회가 세상을 이 관념 하나만을 갖고도 혁명할 수 있을 겁니다 . 그러나 이것은 이미 교회가 아니라는 얘기죠 .
▶시공 바깥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돼있습니까 ? 그 연결을 위해서 날마다 십자가로 불을 끄고 있습니까 ? 그걸 확인해보시면 될 것입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아버지 , 일곱별의 비밀이 십자가를 통하여 날마다 적용됨으로써 , 우리 교회의 촛대에 시공 바깥의 하늘의 불들이 붙어져서 이 세상을 밝힐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
금융에서 빨간 촛대 란 무엇입니까?
빨간색 촛대는 주가의 움직임을 차트로 표시하는 시스템에 사용되는 심볼 유형입니다. 빨간색은 주가가 하루 전날보다 낮았 음을 나타냅니다. 빨간 촛대는 하루 종일 가격 변화에 따라 단단하거나 비어 있습니다.
캔들 스틱 차트는보다 전통적인 선 그래프의 대안입니다. 선 그래프와 마찬가지로 주가를 나타내는 세로 축과 시간, 특히 매일 거래를 나타내는 가로 축이 있습니다. 선 그래프와 달리 매일의 수치는 서로 합쳐지지 않습니다. 대신 매일 위와 아래에 세로선이있는 사각형 블록으로 구성된 "촛대"가 표시됩니다.
그래프의 촛대를 위에서 아래로 살펴보면 첫 번째 수직선은 낮 동안 주식의 최고 시장 가격을 나타내는 지점에서 개시 또는 마감 가격을 나타내는 지점 중 더 높은 값까지 이어집니다. 그런 다음이 시점부터 시작 가격에서 마감 가격으로 내려가는 사각형 모양이되거나 마감 가격이 높을 경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으로 낮에는 최저 가격으로 내려가는 또 다른 노선이 있습니다. 개시 또는 종가가 하루 종일 최고가 또는 최저가 인 경우, 수직선 중 하나 또는 둘 모두가 누락 될 수 있습니다.
채색 및 음영도 정보를 전달하는 데 사용됩니다. 종가가 전날 종가보다 높은 경우 사각형 또는 "촛대"가 녹색이됩니다. 빨간색 촛대는 종가가 전날 종가보다 낮음을 나타냅니다.
한편, 종가가 시가보다 높으면 사각형이 비어 있습니다. 마감 가격이 시작 가격보다 낮 으면 사각형이 단단합니다. 이 지표가 없으면 낮 동안의 움직임 방향을 보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것입니다.
이 시스템을 통해 사용자는 전반적인 움직임의 패턴과 주가의 변동성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어있는 긴 빨간색 촛대는 주식이 전날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상향으로 강한 움직임을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반대로 짧은 빨간색 촛대가 단단하면 슬럼프가 계속되고 있지만 감소 속도가 느려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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